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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라칼럼 ] 2024년 04월 28일



인간이 된다는 것, 인품을 갖춘다는 것, 인격을 지닌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업적이나 성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 이것은 집중력의 시험이다. 사회의 지위로도 지닐 수 없다.

이것은 사회, 문화, 시대마다 다르기에 기준이 아니다. 인간에 관한 정의도 시대, 문화 또는 지역마다 다르기에 절대적 기준 없이 인품을 지녔다고 섣불리 판단해서도 안 된다. 가장 어설프고 볼품없는 기준은 제 맘대로 하는 것이다.

임마누엘 칸트가 제시한 정언명법이란 솔깃한 유혹이지만 인간이 타인의 인격을 무참하게 짓밟고 착취하는 가운데서는 옳았을 것이다.

세대가 바뀐 현실에서는 무가치한 말장난에 불과하다.

인격이 갖춰지지도 않았는데, 인격이란 정의도 세워지지 않았는데, 인격에 대한 비판도 정립되지 않았는데 절대 선하다고 전제한 명법이기에 미련한 주장일 뿐이다.

인격도 갖춰지지 않았는데 그것이 명하는 것이 곧 법이라고 주장했으니 얼마나 무책임한 것인가?

그들의 계몽운동이 얼마나 많은 인류가 희생을 당했던가?

공평을 주장한 방종의 자유는 공정하지 못해서 많은 자가 참수형으로 대가를 치러야 했던가?

유혈로 얻은 자유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은 인류의 수천만 명을 죽음으로 몰아가지 않았나?

자신만의 극단적 이기주의 때문에 수많은 가족과 친지를 상실하게 만들었고, 현재도 만드는 중이다. 자신만, 자기만 평안하면 된다는 집단적 이기주의는 날카로운 칼날보다 훨씬 잔인하다.

이런 만사를 부추기는 계몽운동이 세계 역사만 아니라 개인의 인격에 무슨 덕을 베풀었나?

일단 일을 저지르고 본 후에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모면하기 위해 다른 처방을 첩첩하게 쌓아놓고 인간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쏠리게 하여 생쥐처럼 어두움 속에서 용케 살아간다. 속고 속이는 설사가상이 인류 역사에서 없어진 적이 없다.



인간을 제대로 평가하는 기준도 없이 인권을 논하는 것을 별꼴이 반쪽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극단적 이기심을 버린 채로 교회당으로 오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박애주의와 사해동포주의를 말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세속의 먼지를 밖에 털어버리지 않은 채로 집으로 들어오기에 온갖 잡다한 냄새와 먼지를 집에다 뿜어낸다.

아무리 공기 청정기를 틀어놓는다고 해결되지도 않는데 그것이 대안이기에 속고 속는다. 헛튼데 돈을 쓰기 위해 헛되이 돈에 충렬돼 있다.

인간이 지혜로운 호모사피엔스인가? 지혜가 있다면 지식이 있을 것인데 용케 살아가는 요령법이 지식은 절대 아니다.

요령의 지식을 배우는 현 한국 교육의 상황에서 뭘 배울 수 있나? 단지 사회성을 배울 수 있다면 좋다고 본다.

하지만 그것을 배우기 위해 얼마나 손과 발이 더러워져야 하고, 온갖 잡다한 관행을 닮아야 하는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교회당으로 오는 자와 교회로 오는 자 간에 구분해야 한다.

전자는 외적 부르심이고, 후자는 효과적 부르심이다.

이 구분 조차도 헷갈려선 안 된다. 자신이 중생의 경험을 한 자이기에 의지가 전환됐기에 다른 인간으로 살아야 한다는 결의와 결단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옛 사람의 관행과 관습과 습관과 전투를 치르지도 않는다.

어릴 때, 젊을 때, 제대로 배우거나 인습하지 않은 채로 교회당에서 먼지 틀고 있다면 안타까울 따름이다.

결혼 전의 습관을 제하거나 피하지 않은 채로 동물처럼 산다면, 인간이 아니라 하등동물에 불과하다. 대중이 이러니 뭘 대수로이 여기느냐는 식으로 편익한 자세를 일관한다면 정말 분노가 치닫는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통을 조금이라도 인지하거나 인정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중생의 경험을 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옛사람을 버리고 새사람을 입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부족한 인격이기에 사람되기 위해 교회당을 찾을 수 있지만 이것이 진정이라면 최소한 순종이라도 ...







라 은 성(Rev., 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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